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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단영 추모 1주기를 맞이하며...

2010.05.31 01:08 | Posted by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성소수자위원회

故 단영회원이 좋아했던 후리지아꽃




내가 기억하는 단영이라는 사람.

[이 글은 2010년 3월12일,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故단영 동지의 1주기 추도식에서 고인을 추억하며 함께 읽은 글입니다. 단영은 그녀가 성소수자 운동을 하며 예명으로 성소수자라는 그녀의 정체성이 불필요하게 밝혀질 일을 방지하고자 예명을 씁니다.]

우리가 단영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는 이름 없는 활동가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무명의 활동가는 삶 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동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무명의 투사들이 운동을 만들고 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왔다는 것을요.

서른 세해. 무언가 이루기엔 짧았습니다. 그 흔한 외국 한번 나가보지 못했고, 마음껏 놀지도 돈을 써보지도 못했습니다. 늘 가난했고 늘 쫓기었고 늘 힘들었던 삶. 늘 몸이 아팠고 인정받지 못했던 삶. 하지만 당신은 정말 멋진 사람입니다. 나를 비롯하여, 당신으로 인해 깊이 감동받았던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무명의 이야기입니다. 이룬 것 없다 해도 이미 이루고 간 사람. 늘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는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던 무명 활동가의 삶입니다.

1991년 단영은, 강경대 열사의 죽음 이후 거리로 뛰쳐나온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선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머리에 뽀얗게 사과탄 가루가 내려앉으면 학교로 돌아와 친구들과 뒤처리를 하기 바빴지요. 그녀는 동대문에 위치한 한 여고에서 직선제 학생회를 함께 운영했습니다. 이른바 ‘고운’세대입니다. 그녀는 종종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학교의 모진 방해를 뚫고 대동제에 학생들을 불러 모으는데 성공한 이야기를 상기된 표정으로 들려주곤 했습니다. 친구들과 와~하고 운동장으로 쏟아져나가던 팔팔한 그녀가 생각나 웃음이 지어집니다. 동네를 주름잡던 다부진 소년 같은 단영이 푸름으로 빛나던 청소년 시기였습니다.

1993년, 그녀는 친한 친구 따라 대학을 가서 노래패에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드럼을 쳤습니다.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로 힘차게 노래하던 그녀가 떠오릅니다. 그 뒤 국제사회주의자로써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가보안법 때문에 비합법조직, 이적단체로 쫓기면서도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강하게 지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94년 중반을 넘기면서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에서 생활했습니다. 집도 없이 지내고 사발면 한 그릇 먹을 돈이 없던 고단하고 숨 막히는 시기였지만 그녀는 기꺼이 한 명을 만나기 위해 그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뒤 백화점의 판매직 직원으로 일하면서도 여전히 투쟁의 현장에 있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몸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그녀가 걷고자 한 길이지만, 아직도 저는 그녀가 그 때 조금만 몸을 더 돌봤더라면, 하는 생각이 여전히 듭니다.

1997년 동성애자인권연대(이하 동인련)의 전신인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이 출범하면서 그녀는 동성애자들의 투쟁에 동참했습니다. 동인련 사무실에서 당시를 기록한 몇몇 사진들을 발견하고는 처음 거리로 나왔던 동성애자들의 자긍심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녀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늘 이야기했습니다. 동성애자운동은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운동, 내 스스로를 찾아가는 운동이기에 가장 행복한 운동이라고 말입니다. 저도 그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억눌린 사람들이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일어서는 과정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를요.

2000년, 그녀는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그녀가 살고 있던 지역에 생긴 성동광진 지구당으로 입당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파업현장을 찾아다니며 정치 실천단을 하고, 여성위원회 활동, 지방선거 지원 등을 하며 또 누구보다 당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많은 노동자들을 만났고 이들과 막역한 지기가 되었습니다. 밤을 새워 토론하고 함께 실천하며 지내던 동지들입니다. 그 때는 아마 그녀가 가진 재능을 가장 잘 발휘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누구든 진심으로 만나고 마음을 여는 재능이지요.

그녀가 가진 재능은 무엇보다도 어려움을 잘 알아주는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막히고 어려워서 눈물 흘리고 포기하고 싶을 때 그녀는 약한 몸이지만 우리를 붙들어주는 강한 기둥 같았습니다. 어려워본 사람만이 아는 여유, 그럼에도 옳은 것을 위한 강직함, 특유의 에너지로 우리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퀵서비스 노동자로 한동안 일했습니다. 작은 키에 작은 체구, 화이바를 벗으면 같이 일하는 동료 아저씨들은 깜짝 놀라며 처녀가 왜 이런 일을 하냐고 물어보곤 했습니다. 우리는 역시 ‘형님’이라며 웃곤 했지만, 그녀는 자기 인생을 내던진 시기였다고 합니다. 돈도 학력도 희망도 없고 하지만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던 나날들.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드려야 하고,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싶어 몸부림쳤던 날들. 다시 몸이 망가졌습니다. 몇 번 교통사고를 겪고 몸져 누우면서 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사람들은 몰랐을 겁니다.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그녀가 갑자기 활동을 쉬고 모습이 보이지 않던 이유를요.

2003년부터 그녀는 한 동네에서 논술 선생님으로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그녀를 엄청 좋아하고 잘 따랐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할 때 그녀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정말 잘 발휘했습니다. 생활이 조금 안정되면서 그녀는 다시 동인련에 나왔습니다. 그 때가 2004년이었습니다.

당시 동인련에 있던 여성들에게 그녀는 왕언니이자 큰 형님 같았습니다. 고민도 들어주고 감싸도 주면서 다시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처음 함께한 일은 동성애자 상담센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글도 오랜만에 써보고 활동도 오랜만이다 했지만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우리가 발행한 자료집에는 그녀가 정리해놓은 성소수자의 노동차별에 대한 글이 실려 있습니다. 정말 정성어린 글이고 앞으로 우리가 관련 활동을 하면서 기초자료로 훌륭한 역할을 해준 글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사회주의로 삶을 살아가는데 무엇이 중요한지 늘 다잡아주는 가장 절친한 동지이자 선배, 그리고 연인이 되었습니다. 제게 일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단영을 말하겠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진심으로 만나고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가르쳐준 사람입니다.

2005년이 되어도 그녀는 계속 아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먹어온 스테로이드제 때문에 급격한 알러지와 발작, 크고 작은 병이 잇따랐습니다. 저는 그녀를 데리고 잘한다는 한의원에 갔고 그 때부터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쑥뜸, 죽염, 봉침, 한약......그리고 매일 산을 뛰면서 2년을 꼬박 치료했습니다. 아마 그때 당시 함께 생활한 분들은 그녀가 얼마나 몸이 아팠는지 알 겁니다. 그리고 얼마나 건강을 열망했는지 잘 아실 겁니다. 2006년 어느 날 마지막 치료라며 충주에 있는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달을 누워 가슴에 커다란 흉터를 내며 뜸을 떴습니다. 건강해지면 다시 열심히 활동할 수 있다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 또 활동을 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속사정은 잘 모를 겁니다. 그래서 많이 애태웠습니다. 저도 가슴이 시커멓게 타고 그녀 가슴은 더욱 타들어갔겠지요. 어떻게든 빨리 병을 고쳐 그녀의 빛나는 웃음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빛나고 윤이 나는 천성이 조직가였으니까요. 그래서 그렇게도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지고 활동을 못하는 것에 대한 조급함이 강했나 봅니다.

2008년 벽두, 새 출발을 다짐하며 그녀와 저는 소백산에 올라 일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늘 하고 싶었던 연극을 통한 교육을 하기 위해 과감히 교대 입학 시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옆에 함께 가는 동반자로써 한결 건강해지고 긍정적으로 변화한 그녀가 참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제 우리도 긴 터널을 지난 것 같은 안도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안정감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7월이 되면서 그녀는 가끔 길도 까먹고 번호도 까먹고 했습니다. 늘 똑 부러지고 인간 네비게이션으로 통하던 그녀에겐 좀처럼 볼 수 없던 변화였습니다. 8월 초... 악성 뇌종양 말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리고 8개월간의 투병 후 그녀의 생일 전날 단영은 하늘나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났습니다.

직장과 학교 모두 그만두고 그녀를 간병하던 기간 내내 저는 이 말도 안 되는 사실을 납득해야만 하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나날이었습니다. 그녀는 가장 힘든 질병의 고통 속에 날마다 의식이 흐려지고, 저는 어떻게해도 인정받을 수 없는 동성 파트너의 한계, 가족 바깥의 가족으로 너무나 서럽지만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간병을 지속해 갔으니까요. 우리는 너무 외로웠습니다. 일생 그렇게 추웠던 겨울이 있을까요? 우리가 둘 다 마음 놓고 행복하게 오후를 즐겼던 시간은 가끔 주어지던 우리가 다니던 교회 사랑방에서의 낮잠이지 않을까요.

거짓말처럼 단영을 떠나보낸 후 저는 정말 할 일이 없다, 몸이 참 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몸이 일으켜지지도 않아서 정말 간병 못하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남은 저는, 숙제처럼, 벽제 화장장에서 장지로 출발할 때 저를 버리고 간 단영의 가족들에 대한 원망을 풀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영문도 모른 채, 단영이 마지막 묻힌 장소도 모르고 삽니다. 가족들에게 몇 번을 연락하고 물어보고 찾아가서도 물어봤습니다. 이유도 이야기하지 않고 가르쳐주지도 않는 가족들 앞에서, 내가 그녀의 동성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위축되게 했습니다. 친구들은 아마 그래서 안 가르쳐주는 거라고 많이들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원망을 털어야겠습니다. 이제는 이해 안되는 모든 일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납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단영이 사랑한 가족들이라는 사실을 제가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가족이 되고 싶어서 되지도 않는 용을 썼던 제 모습이 생각나서 웃음도 나왔지만, 그걸 보답받기를 바라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저 가족들만이 잘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비참함이면 복수하면 되지만,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누구나 겪는 아픔이라면, 혼자 증오하기 보다는 그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훨씬 낙관적인 방법이죠. 1주기를 보내며 새로운 다짐입니다.

그렇게 1년이 다 되었습니다. 어제 사진을 정리하는데 많이 눈물이 났습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건 뭘까요? 저는 얼마 전에 언니의 유품인 옷가지 몇 개, 주로는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에서 짧은 머리카락을 몇 개 발견하고는 아직 그걸 빨지 않았어요. 그 머리카락은 산 걸까요, 죽은걸까요? 우습지만 그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저는 문득문득 이유 없이 울기도 합니다.

아마 제가 살면서 또 많은 이들을 만나고 하겠지만 단영이라는 사람은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요.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참 울고 싶어집니다. 꼭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는 아닙니다. 슬픔은 애초에 벗어났죠. 다만 사람은 삶의 어느 순간에, 순간적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감정을 울음으로 표현하게 되는 걸겁니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다음에는 더 많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법정스님이 말씀하셨지요. 단영은 제가 정말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 단영을 각자의 마음으로 똑같이 아끼고 사랑하시지요. 저는 앞으로도 열심히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겁니다. 그것이 단영이라는 사람이 보여준 ‘운동’의 방식, 바로 ‘사랑’하는 자의 힘을 실천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단영을 진정으로 기억하는 것이지 않을까요.
단영의 1주기를 함께 추모하고, 웃고 울어준 동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경 드림
새순돋는 2010년 3월에

[편집자주] 웹진준비가 늦어져 고인을 추모하는 글이 늦게 게재되었습니다. 이 점 글을 보내주신 이경씨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글을 보며 함께 추모하고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