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0 지방선거를 바라보며, 이제 진보연합이 절실하다.

2010.10.04 15:47 | Posted by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성소수자위원회



* 이 글은 지난 6.2지방선거 이후에 성소수자위원회에서 성소수자의 눈으로 6.2지방선거를 바라보면서 쓴 글이며 성소수자포럼에 발제되었던 글입니다. 시기가 많이 지났기는 하나, 그 내용의 중요성이 있기에 웹진을 통해 공유하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곽이경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6. 2지방선거의 개표결과를 지켜보느라 새벽까지 잠을 설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미 비슷한 종류의 기사가 많이 나왔으니, 이번 선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MB에게 날리는 통쾌한 뒤집기”였다. 더불어 “촛불이 죽었고 보수화되었다”고 이야기하던 논자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급진화의 물결이 저변에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입증한 선거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MB가 ‘반성’이나 하라던 ‘촛불국민’들은 높은 투표율로 한나라당을 참패시키며, 4대강 삽질, 민영화, 전쟁몰이, 전교조 탄압, 이명박식 교육, 막가파 개발 등에 제동을 걸었다. 성소수자들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당연하게도 다수가 한나라당의 참패에 통쾌함을 느꼈으리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두 진보정당들도 2006년 지방선거와 비교하면 대단히 많은 당선자를 낳았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수도권인 인천에서 처음으로 기초단체장을 당선시키고, 울산 북구를 되찾아왔다. 이전보다 더 많은 기초의원과 광역의원들이 당선되었다. 이를 두고 민주노동당은 “반MB민주연합의 승리”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진보정당이 지방자치단체에 진출하면 분명히 진보적 관점에서 노동자, 서민, 억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욱 귀기울여 듣고 실천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반MB민주연합은 문제였다. 선거만 보자면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 연합하여 (광역단체장 후보를 단일화하고) 더 많은 기초단체장과 의원들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계급정치의 면에서 보자면 아쉬운 점이 너무도 많다. 서울처럼 격전지에서의 성적은 더욱 초라하다. 서울시장후보를 일찍 단일화한 덕분에 진보적 목소리를 거의 들을 수도 없었고, 존재감도 미미했다. 물론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의 정책과 공약이 급진적이고 좋았지만, 선관위가 토론기회에서조차 배제시켜버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대중들은 진보후보의 목소리 듣기가 힘들었다.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는 후보들은, 광역단체장은 민주당과 손잡았는데, 정작 자신은 민주당 후보를 제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안타까운 상황도 생겨났다. 여튼 존재감이 없던 덕분에 서울지역에서 민주노동당의 정당득표율은 전국 절반에 그치고 말았다. 덕분에 그동안 진출했던 서울시의원 비례1번조차 당선되지 못했다.


반면에 내가 사는 영등포구에 구청장으로 출마한 진보신당 후보는 무려 7.6%를 얻기도 했다.(진보정당이 처음 구청장으로 출마했는데도 엄청 높은 득표율이다!) 전국적으로 볼 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합한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는 진보%가 넘는 득표율로 나타났다. 그 말은, 반MB정서가 막강하여 민주당의 지지율이 급상승했지만,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보적 대안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MB정서로 다수가 민주당을 선택하긴 했지만, 사람들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부 진보년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이라크 파병, 한미FTA, 비정규직법, 의료보험 민영화 등을 애초에 추진한 것은 민주당이었지 않나. 그러므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민주당과 공동정부를 구상한다면 강기갑 대표의 표현대로 “진보정당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색깔을 보이지 못하게”될 것이다. 그야말로 차악이 최악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반MB민주연합을 두고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하지만, 그 때문에 “진보적 대안”을 염원하는 대중에 부응하는 “진보적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동안 민주당이 저지른 엄청난 해악과 과오조차 진보의 이미지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효과를 낳았음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진보신당을 민주노동당보다 낫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심상정 후보도 유시민을 지지하며 마지막 순간 후보 사퇴를 하였고, 부산에서도 민주연합이 성사되었다. 그리고 현재 진보신당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여전히 민주연합을 반대하지 않고 열어놓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두 진보정당 간에 어디가 더 나았는가를 두고 논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그럼 민주노동당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노동자 계급 정당이다. 당원의 40%가 조직 노동자들이며 여전히 노동계급 이슈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번 선거에서의 선거연합이 실망스러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자유주의적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므로 아예 민주노동당과의 협력을 거부하거나 민주당 일부로 취급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는 이해할지 몰라도) 바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민주연합이 아닌 진보연합으로의 방향성은 유효하며, 우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여전히 노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소수자도 반MB민주연합에 기댈 수는 없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성소수자도 민주당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여기서 접할 수 있는 정당과 성소수자 문제에 대한 사례는 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적인 자본가 지향의 정당이 어떤 식으로 동성애 쟁점 같은 논쟁적이고 공격받기 쉬운 쟁점을 위기 상황에서 후퇴시켜 버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로 80년대 영국 노동당 예가 적절할 것 같다. 다음은 <동성애자 해방과 마르크스주의>에서 관련 사례를 발췌한 것이다.


노동당이 기반한 선거주의 때문에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한 이러한 새로운 정책은 언제나 실행되지 못했다. 19
83년 이후로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는 당내부와 우익 양 방향에서 모두 공격받게 되었다. 이런 공격 앞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후퇴했다. 반동성애 감정은 넓고도 깊게 퍼져 있으며, 불과 지난 몇 해 사이엔 더 엄청나게 강해졌다. 언론이 에이즈에 대해 떠들며 병적인 히스테리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이즈를 ‘동성애로 인한 전염병’ 으로 묘사했다.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영향 때문에 동성애자 운동과 노동당 안의 동성애자 활동가들은 더더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 여부가 시험대에 오를 때마다, 노동당은 번번히 극적으로 실패했다. 1983년 버몬지 보궐선거에서 피터 태첼 은 여전히 언론이 끄집어 내는 최악의 반동성애적 모함을 받게 되었다. 당시 노동당 당수였던 마이클 풋 은 그를 모른 척했다. 그리고 보도된 바에 따르면, 닐 키녹 은 피터 태첼에 대한 마녀사냥에 관해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고 한다. “피터의 문제는 마녀와 요정 - 요정은 구어로 남자 동성애자를 뜻한다 - 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채텔은 그의 (좌익적인) 지구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말고, 비난에도 응수하지 말라’ 는 지시를 받았다. 결국 노동당은 거센 동성애 반대운동에 공공연히 대항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문제가 운동의 되었던 이상, 그런 책략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동맹 (Alliance : 1983년 과 1987년 영국선거에서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이 결성한 일종의 선거연합) 은 반동성애 물결을 타고 승리를 휩쓸었다. 이번 지방후보는 확실한 이성애자였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선거전단에는 후보 개인의 사진만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를 꼭 껴안은 사진까지 들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정상적인지’ 보여주려고 말이다.


한 편, 미국 민주당을 현재 진행되는 반MB민주연합에 빗대어 비교하기도 한다. 때문에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미국 민주당 모델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진보정당들이 (색깔을 버리고) 민주당 밑으로 모여야 MB를 패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적지 않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야말로 다를게 별로 없는 두 정치집단이며, 진보정당들이 민주당과 잘못된 연합을 한 탓에 지금 미국은 대안적 정치세력을 만들어내기 너무 어려워졌다. 지난 대선에서 켈리가 ‘부시만 아니면 다 된다’는 슬로건으로 출마한 것은 왠지 이번 지방선거를 떠오르게 한다. 켈리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라크 전쟁 지지자였다.


그럼 켈리에 대한 지지를 둘러싸고 동성애 쟁점이 혼란에 처하게 된 이야기를 잠시 하고자 한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동성결혼문제를 대선 전략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부시는 이라크전쟁 장기화와 반인륜적인 점령으로 떨어진 자신의 지지율을 사회의 보수적 정서에 기댐으로써 회복시켜보려고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동성결혼에 대한 반대였다. 동성결혼과 같이 일반적으로 터부시되는 이슈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사회를 냉각시키고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난을 모면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민주당 캘리의 텃밭은 메사추세츠주였는데, 그 주에서 동성결혼 합법화 발표가 나면서 켈리의 입장은 좀 난처해졌다. 때문에 그는 각종 보수단체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동성결혼을 반대하지만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헌법개정에는 반대하는 애매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켈리의 이런 태도는 동성결혼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 낙태 등의 민감한 사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뉴욕타임즈는 이러한 그의 태도를 매우 기회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그가 도대체 부시보다 나을 것은 뭐였단 말일까? 미국 진보운동은 이 가운데서 우왕좌왕하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공화당엔 우파 동성애자들이 있었는데도 말할 것 없이, 동성결혼을 반대했다. 도저히 이해 안가는 일이지만, 이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성소수자에게 해로웠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보자. 노무현 정부 시절에 여성운동가들이 대거 참여 정부로 들어갔지만 과연 여성의 삶은 나아졌는가? 마치 이제는 뭔가 될 듯할 희망을 주다가 더한 배신으로 끝나는 형국이었다. 우리가 아직도 붙들고 있는 차별금지법은 바로 노무현 정부 시절 누더기가 되었다. 우익 기독교의 거센 반발에 냉큼 성적 지향을 차별 영역에서 삭제해버린 건 다름아닌 민주당 정부였다. 동성애는 약한 고리이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혐오증은 진보운동도 이 문제에 매우 취약하도록 만든다. 그럴때일수록 누가 우리의 ‘동맹’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소수자는 민주당에게 배신 당할 것인가? 아니면 부족하나마 소수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사회적 차별을 금지하기 위해 애써온 진보 정당과 함께 독자적 대안을 만들어내야 할 것인가? 답은 명백한 것 같다.


현재 당 지도부 선출을 위한 당직선거가 진행되고 있다. 당직 선거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사실상 민주연합을 모두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큰 차이점이 나타나지 않아, 좌파적 관점으로는 누구에게 표를 던져야 할지가 난감한 것이 사실이다. 당의 독자성을 강화하여 실현할 것인지, 진보연합을 통해 민주연합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방법적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떤 후보는 상대적으로 진보대연합을 강조하긴 하지만 민주연합의 과정으로서의 한계를 두고 있기에 아주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민주연합에 기댈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진보적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보연합을 다시금 성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과제이다. 앞으로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민주연합과 진보연합 사이의 논쟁은 더욱 커질 것이다. 우리는 이런 논쟁에서 성소수자 당원들의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이제 인천과 울산에서 구청장으로 지방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예전 울산에서 두 민주노동당 구청장들이 보여주었던 ‘공무원 노동자에 대한 단호한 방어’가 기억난다. 민주노동당이 지방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보다 명확한 노동자 서민 중심의 정책(예산배정부터), 중앙정부의 탄압 등에 맞선 단호한 대처와 방어 등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잘 되면 민주노동당은 진보정치의 희망을 염원하는 대중을 지역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이나 국참당과의 공동지방정부 구성은 제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이야 민주당이 진보적 언사를 할 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태생이 다른 정당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당이 노동자서민을 배신했을 때 그 책임을 떠안으려는 것일까? 도청에 소수가 임명되어 들어간다한들 주요 정책에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 이야기한 내용의 요지는 “계급 이익”은 “성소수자의 이익”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당이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도록 요구하고 견인하는 것에 우리 몫도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든 진보신당이든 진보운동은 더 이상의 분열을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제는 진보연합이 절실하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기술적인 선거연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의 연합은 선거공학에 따라 무원칙하게 민주당과도 타협하는 잘못을 범한다. 진보연합은 이명박 정부에 맞선 진보진영의 공동투쟁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지금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모든 것에 분노하고 있다. 2008년에 우리가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쟁의 고양은 진보정치의 장을 넓혀 잠재적으로 우리와 함께할 동지들을 발견하게 해 줄 것이다. 투쟁 속에서 건설된 진보연합은 비로소 독자적 대안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건설되는 독자적 대안이라야 진정 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의미 있는 토론과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다. 성소수자 운동도 그 일부가 되어야 하고 함께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참고 <동성애자 해방과 마르크스주의>에서 영국 노동당의 사례 일부 발췌함>

GLF가 완강했던 1970년대에는 투사들이 노동당에 신경쓸 겨를이 거의 없었다. 대다수의 혁명가들이나 동성애자 활동가들에게 노동당은 활동의 중심이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 동성애자임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이유로 많은 동성애자들이 해고당했다. 그러자 투쟁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노동당은 이런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노동당 지방의회가 해고에 앞장서기까지 했다!

1979년에 수잔 쉘은 레즈비언임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이유로 뉴햄의 노동당 지방의회에 의해 해고당했다. 이것은 숱한 사례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전통적으로 성 정치에 관한 노동당의 전력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들에게는 동성애를 상류계급의 비행(非行) 쯤으로 여기는 강경한 청교도적 감리교파의 기질이 있었다. 이런 태도는 스탈린주의와 아주 비슷했다.

1960년대에 노동당은 동성애자들의 권리나 그 어떤 법률개혁도 옹호하지 않았다.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의회 내 자유투표의 결과였다. 노동당은 보수적인 두 지지층, 즉 감리교 유권자들과 가톨릭 유권자들을 늘상 의식했다. 그래서 피억압 계층의 옹호자 역할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투쟁처럼 노동당이 ‘단단히 책임지겠다’ 는 사안에 대해서도 노동당의 행적은 보수당과 다를 게 없다.

인종차별적인 이민규제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동아시아로부터의 아시아계 이민의 제한이나 2계층제 (two-tire - 법제화된 개념은 아니고 범죄자.동성애자 등을 천민으로 분류하는 것) 영국 시민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도 노동당 정부였다. 백인종차별주의자들의 표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원칙에 대한 책무를 저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노동당의 의무 태만이 단순히 불성실함이나 개인적인 배신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개량주의의 한계 때문이다. 노동당이 내각을 구성하고 있을 때에도 실질적인 권력은 그들에게 없다. 여전히 국가의 운영권을 쥐고 있는 건 선출되지 않은 공무원이나 판사, 군장교 등이다. 일개 노동당 정부가 그들의 행실과 편견을 제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꽤 많은 1970년대 동성애자 활동가들이 지금은 노동당에 들어가 있다. 동성애자 밀집지역에 반대할 정도로 이제 동성애자 해방운동은 거의 개량주의와 한통속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1970년대 계급투쟁이 침체되면서, 당장 변화가 일어나리라 기대하던 많은 활동가들은 사기가 떨어졌다. 이미 노동계급에게는 사회를 박살내고 새세상을 건설할 만한 힘이 없는 듯했다. 이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갈 길을 제시해 주는 게 노동당인 것 같았다. 남녀 동성애자들이 자율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노동당의 광범한 교회조직이 제공해 준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들은 더 폭넓은 노동운동의 일부가 되고, 노동당 조직을 통해 사회를 서서히 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혁명적인 변화를 포기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택했다. 그들은 해당 위원회에서 적당한 사람들을 골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말만 달랐지 정치에서는 GLF 이전의 CHE 꼴로 되돌아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편에서는 노동당 내 일부가 변하고 있었다.

당의 왼편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노동당 정부의 최근 행적에 환멸을 느끼고서 전통적인 노동당 정치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1980년대에는 토니 벤 이 신좌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단순히 노동당 대회에서 합당한 결의안 (노동당 정부는 늘상 이것을 묵살했다)을 내오는 것 뿐 아니라, 활동가들이 하원의원들과 정부를 통제할 수 있도록 당의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한 신좌파는 1970년대 운동의 핵심을 추출해낸 새로운 정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이전의 노동당 좌파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억압에 맞선 투쟁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것을 위하여 두가지 상호보완적인 전술이 채택되었다. 하나는 당의 정책과 체질을 변화시키기 위해 전국적으로 노동당 내부에서 투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지방의회에 있는 좌파의 기반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히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이전 어느 때보다 더 힘차게 옹호하는 것을 뜻했다.

노동당 대회에서 소수파는 평등 고용정책을 통과시키고, 동성애자 조직에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남녀 동성애자 분과위원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1986년 노동당 대회에서는 정식으로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가 확인되었다. 이 사안을 다음번 선거강령에 포함시키는 데는 3분의 2의 득표차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이 기반한 선거주의 때문에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한 이러한 새로운 정책은 언제나 실행되지 못했다.

1983년 이후로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는 당내부와 우익 양 방향에서 모두 공격받게 되었다. 이런 공격 앞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후퇴했다. 반동성애 감정은 넓고도 깊게 퍼져 있으며, 불과 지난 몇 해 사이엔 더 엄청나게 강해졌다. 언론이 에이즈에 대해 떠들며 병적인 히스테리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이즈를 ‘동성애로 인한 전염병’ 으로 묘사했다.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영향 때문에 동성애자 운동과 노동당 안의 동성애자 활동가들은 더더욱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 여부가 시험대에 오를 때마다, 노동당은 번번히 극적으로 실패했다. 1983년 버몬지 보궐선거에서 피터 태첼 은 여전히 언론이 끄집어 내는 최악의 반동성애적 모함을 받게 되었다. 당시 노동당 당수였던 마이클 풋 은 그를 모른 척했다. 그리고 보도된 바에 따르면, 닐 키녹 은 피터 태첼에 대한 마녀사냥에 관해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고 한다.

“피터의 문제는 마녀와 요정 - 요정은 구어로 남자 동성애자를 뜻한다 - 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채텔은 그의 (좌익적인) 지구당으로부터 ‘공식적인 자리에 나타나지 말고, 비난에도 응수하지 말라’ 는 지시를 받았다. 결국 노동당은 거센 동성애 반대운동에 공공연히 대항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피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문제가 운동의 되었던 이상, 그런 책략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동맹 (Alliance : 1983년 과 1987년 영국선거에서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이 결성한 일종의 선거연합) 은 반동성애 물결을 타고 승리를 휩쓸었다. 이번 지방후보는 확실한 이성애자였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선거전단에는 후보 개인의 사진만이 아니라 아내와 아이를 꼭 껴안은 사진까지 들어 있었다. 그가 얼마나 ‘정상적인지’ 보여주려고 말이다.

1986년 노동당 대회에서 동성애자 권리에 관하여 좌파가 거두었던 승리에도 오점은 남아 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그 문제를 숨기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BBC 방송이 대회 생중계를 딱 한번 중단한, 동성애자 권리를 토의하는 시간 15분을 ‘놀이학교’ 라는 프로그램의 시간대와 일치하도록 용의주도하게 계획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노동당 지방의회에서 공식적인 고용차별을 폐지하고, 남녀 동성애자 분과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지방의 동성애자 단체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동성애자 해방을 위해 한 일은 그게 전부였다. 이런 모든 일은 환영할 만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지방세 지출상한선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탓에 그들에게는 자금이 부족했다. 때문에 실제로 남녀 동성애자들에게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긍정적인 이미지’ 정책을 통하여 유일하게 이 문제에 좀 더 깊이 다가가려 했던 것은 해린지 지방의회였다.

이 정책은 지방의회의 모든 선전 통로를 이용하여 남녀 동성애자들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조성하려던 것이었다. 특히 학교에서 이 정책을 활용하여 오직 이성애만이 ‘정상적’ 이라는 관념을 되받아칠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노동당의 분파에 의해 채택되어 1986년 지방선거의 쟁점이 되었다.

지방의 보수당원들은 당장에 우익의 반발을 충돌질했다. ‘부모 행동단체’ 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가두에 나서서 ‘변태성욕자들’ 에 반대하고 ‘품위있는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는 지지세력을 규합했다. 몽상가가 아니고서야 그 정책에 대한 반대가 전혀 없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우익 광신자들과 싸울 전술이 노동당에게 없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반격에 맞서려는 운동이 시작되긴 했지만, 주로 노동당 외부의 활동가들에 의존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긍정적인 이미지’ 정책이 지방의회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게 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삼았다. 그래서 그 이상으로 지방의회를 ‘난처하게 할’ 지 모를 일은 일체 하지 않도록 정해져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지방의회에 맞설 수가 없었다.

노동당 해린지 지구당은 공식적으로는 이 정책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을 따름이었다. 동성애자 권리가 선거에서 불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게 점점 더 분명해 짐에 따라, 노동당 최고의원들까지도 그 문제에서 손 뗄 궁리만 하게 되었다. 1986년 후반에 결정적인 배신의 순간이 다가왔다. 반발은 흑인 사회로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동성애는 흑인가족의 기초를 위협하려는 백인들의 계략’ 이라고 단언하는 ‘흑인 부모 행동단체’ 가 등장하였다.

1986년 12월에는 이 단체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교육위원회 - ‘긍정적인 이미지’ 정책을 후원했던 바로 그 단체다! - 의 인종관계 수석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87년 총선의 전초전에서 보수당과 동맹은 동성애자 권리문제를 이용해 노동당을 공격하였다. 이것은 ‘정신나간 좌익’ 에 대한 반대운동의 일부였다. 그들이 공격하면 할수록 노동당은 점점 더 후퇴했고, 이러한 후퇴는 1987년 2월 그린위치 보궐선거 직후의 패주로 이어졌다.

동맹의 뜻밖의 승리에 자극을 받은 키녹의 공보관 패트리샤 헤윗 은 런던 하원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연금 수령자들 가운데 남자 동성애자와 여자 동성애자는 비용이 많이 듭니다.” 노동당의 누군가가 이 편지를 즉시 푸퍼트 머독 의 『선』(Sun) 지에 누설했고, 『선』지는 그것을 이용하여 동성애자 권리를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지지를 포기할 수 없을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노동당은 당장 이 운동에 들러붙었다.

헤윗이 우익 광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1970년대에는 전국 시민자유 회의 (NCCL : 1989년부터 ‘자유’ 라는 이름으로 개칭한 시민운동단체) 의 서기로 있으면서 NCCL이 동성애자 차별에 대해 원칙적인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그녀는 단지 노동당이 벗어날 수 없는 선거정치의 논리를 유독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동성애자 권리는 표를 끌어모을 수 없는 문제니까 빼버리는 게 당연했던 것이다. 노동당 좌파는 거의 대부분 헤윗의 편지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그들도 패주에 동참했다. 동성애자 권리를 가장 충실하게 지지했던 노동당 런던 지구당도 곧이어 그 문제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두 우익을 입 다물게 만들어 버리면 반격도 사라질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Comment